더 건강한 미래, 함께 67주년

1945-1968

인류애로 시작된 공공의료의 첫걸음

광복 전후 한국 보건위생과 의료 현실

해방 이전 한국의 보건의료 상황은 이렇다 할 기반이나 체제를 갖추지 못한 빈약한 수준이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위생국 (보건후생국으로 개편)이 설치된 후 공중보건행정은 현대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국립방역연구소로 개칭한 조선방역연구소는 백신의 생산과
접종을 도맡으며, 군정기 전염병 관리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미군정기에 실시한 한국인 의사들의 미국 연수는 미국식 공중보건체계와 의학교육체계를 한국에
빠르게 도입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구조와 방향을 규정하는 상징적
역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그에 긴밀히 연결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거치면서 한국 의학계는 미국식
공중보건과 보건의료체계, 의학교육체계를 빠르게 도입하게 되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4.19

서울 한가운데, 세계 최고의 의료진과 최신 시설로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1960년의
국립중앙의료원은 우리나라 역사의 큰 획 속에서 언제나 빛을 발했다. 1960년 4월 19일,
3.15 부정선거 이후 정권을 비판하는 시위가 이어지며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까지 경찰의
무자비한 총격 앞에서 피를 쏟으며 거리에 쓰러졌다. 총격 사태 발생 후 의료원에서 근무하던 피부과
과장은 직접 구급차를 몰고 거리로 나가 부상자를 의료원으로 이송했다. 끊임없이 환자가 밀려 들었고,
포화상태의 응급실 앞에서 A, B, C등급으로 중증도를 분류하여 골든타임 사수를 통해
촌각을 다투던 수많은 환자의 목숨을 구했다. 총격으로 이송된 260여 명의 중상자 중 단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이듬해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전후 보건의료체계 재건과 의료 원조의 두 갈래 길

전쟁은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유엔과 미국은 막대한 규모의 한국 원조 계획을 세우고 다방면으로 한국 사회 부흥을 위한 무상
원조를 시행했다. 또 하나의 원조 공여자였던 북유럽 3국은 국가 차원의 공적원조 형태로 한국의
의료체계 재건을 지원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의 정부는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및 한국 정부와
교섭을 거쳐 국립중앙의료원 건립을 위한 공동 협의에 돌입하여, 1956년 3월 13일, 삼자 간에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마침내 1958년 10월 2일
국립중앙의료원 준공식이 개최되었다. 시설과 장비, 그리고 의료진의 실력에서도 국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국립중앙의료원의 출발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경사로 여겨졌다.

북유럽식 공공의료체계의 도입과 운영

보건의료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사회에 ‘동양 굴지의 의료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메디컬
센터’가 들어서 세계적 수준의 의술로 공공 의료서비스를 펼친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1958년 11월 28일 정식 개원부터 1968년 9월 30일로 스칸디나비아
3국이 의료 원조를 종료할 때까지 10년간 총 201만 명, 이 중 140만명의 환자가 무상 진료의 혜택을
누렸다. 더불어 한국 최고의 상급 종합병원으로서 공공의료의 본보기를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수련 병원으로서 실력과 인성 면에서 탁월한 의료인들을 길러냈다. 한국전 참전 이래로
스칸디나비아 3국이 보여준 꾸준하고 성실한 헌신은 병원과 의료인들이 가져야 할 사명과 본질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1968-1976

운영권 이양과 독자생존

유료진료제와 운영권 논란

1968년 10월 1일을 기해 한국 정부의 단독책임 관할로 완전 이양되면서 국립의료원은 독자적인
운영체제로 전환되었다. 1968년 1월 1일부터 한국 정부의 책임하에 시범적으로 시행된 유료진료
체계는 자비 환자는 언제든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 반면 무료 환자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한편, 국립의료원이 보건사회부로 이관되면서 운영권을 둘러싼 논쟁도 불거졌다. 중앙정부의 권위로
서울시의 주장을 무마하긴 하였지만 국립의료원의 운영권을 둘러싼 논쟁은 보건사회부의 운영
방식과 실태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국립의료원의 운영권을 둘러싼
서울시와 보건사회부의 갈등은 국가중심의료기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묻어둔
채 그대로 봉합되었다.

베트남 의료지원단 파견

1964년 8월 베트남 통킹만에서 일어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 함의 해상전투는 베트남 지역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시발점이 됐고, 이는 월남전으로 확전됐다. 지루한 공방 끝에 1973년 1월
28일 월남 휴전협정이 체결되며 마침내 월남전은 끝을 맺었고, 1970년 6월 4일에 조인된
‘한-월경제기술협력협정’으로 ‘파월 한국의료단 증원 및 한월의료원 건설 사업’이 추진됐다.
1974년 3월 2일, 착공 2년 만에 외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10개 진료과를 갖춘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문을 연 한월의료원에는 한국의 의료사절단 21명과 베트남 의료인 300 여 명이 함께
근무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년 뒤 공산월맹군의 남침으로 베트남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지며,
한국인 의료진이 급박하게 철 수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수련의·간호사 파업과 민간 종합병원 확대

수출 중심의 한국경제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강도 높은 노동과 장시간 근무는 보건 의료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점점 심화되는 병원 노동의
악조건과 불만이 쌓여 시작된 국립의료원 수련의와 간호사들의 파업이 파장을 일으켰다.
더욱이 1970년대의 의료계는 공공부문에서 민간으로 서서히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한 시기 였다.
1970년을 전후하여 국내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이 대거 신설되 었고, 국립중앙의료원은 구성원들의
대규모 이직에 직면했다. 국립의료 원에서 성장한 중진 의료 인력들이 다른 의료기관들로 차출되면서
정작 의료원의 발전은 뒤처져만 갔다.

의료수가 인상과 무료병동 별도 운영제

1973년 10월 산유국과 국제 석유자본간의 대립으로 석유값이 종전보다 4배나 치솟는 이른바 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는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누적된 의료진들의 보수 인상 요구와 국공립병원들의 시설 및 장비 개선 요청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정부는 석유파동에 따른 물가인상안과 함께 의료수가 인상을 단행했다.
서민들에게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유료화 전환 이후로 국립의료원조차 무료 환자 비율이
크게 줄면서 빈 병상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립의료원은 1974년 5월부터 무료 병동을 별도로
마련해 무료 환자들이 돈이 없다는 죄로 병원에서조차 차별대우를 받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한
세심한 배려를 제공했다.

1977-1988

경제개발과 의료의 사회화

의료보호제도와 의료보험제도의 실시

1977년 말에 법률 제3076호로 「의료보호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978년 5월 23일
「의료보호법 시행령」이 공표되면서 생활보호대상자와 일정 수준 이하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그들이 자력으로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 국가 재정으로 모든 질병이나 부상에 대해
의료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의료보호제도가 시행된 지 6개월 만인 1977년 8월 1일,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제도가 전격 시행 되어 명목상으로 존재하다시피 했던 의료보험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공공보건의료기관의 경우 의료보험제도의 전격 도입은 결과적으로 의료진들의
진료 부담은 물론 병원의 재정적 부담을 더 가중시켰다.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

1983년 10월 9일, 당시 대통령 순방의 첫 나라였던 미얀마에서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던 중 폭탄이 터졌고,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관료와 언론인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의
참사가 발생했다. 국립의료원 의료진의 현장 급파가 결정된 후 사건 발생 이튿날인 미얀마 수도
양곤에 도착해 미얀마 제2육군병원으로 달려갔으나, 미얀마 현지 의료수준으로는 치료가 어려운
정도였기에 본국으로의 즉각적인 후송 논의가 진행됐다. 이후 국립의료원 의료진은 별관 3층에
입원한 부상 환자 전원의 치료를 위해 의료원 직원은 비상근무를 진행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공공의료 중추로서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국가 중심 병원이자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중심의 무게와
견고함을 증명했다.

설립 사반세기의 의료원

1978년 10월 2일, 국립의료원 간호전문대학 9층 강당에서 개원 2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20년간 국립의료원을 거쳐 간 외래환자는 810,621명, 입원 환자만도 175,732명에 달할 정도로
활발한 진료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국가 보건의료망의 중앙병원으로서 국민 보건 향상과 의정
시책을 구현하는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정부의 재정적, 정책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공공의료부문의 중심 병원인 의료원의 시설과 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는 1979년 11월,
국립의료원의 개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꼬박 3개년에 걸친 증개축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던
1983년 10월 7일, 국립의료원에서 열린 25주년 개원 기념식은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암 등록 사업

국립의료원은 1976년 병리과를 통해 당시 가장 발생 빈도가 높은 자 궁경부암을 비롯한 암의
조기진단을 위한 ‘암세포 검진기술 훈련계획’을 작성하고 세계보건기구(WHO) 한국지부에
사업계획을 건의하면서 부터 암 등록제 시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암등록조사서의
수집 업무를 국립의료원이 담당하기로 하였고, 1979년 암 등록 사업이 정부 신규사업으로 인정받으며
암 등록제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립의료원의 암 등록 사업은 국가 암 관리의 기초자료를
생산하는 사업으로서 특정 지역, 연령, 성별의 주민들에게 발생하는 암의 원인 연구와 예방,
진료에까지 폭넓게 활용될 수 있는 통계를 생산하는데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1989-1997

민주화와 공공의료의 주변화

공공성과 시장주의의 각축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실시된 이후
가입 대상 범위는 관리가 쉬운 직장의료보험조합에만 머물러 있었다.
농민들과 보건의료시민단체들은 근 10년에 걸친 지지운동으로 기존 가입자와 정부의 강력한 저항을
극복 하고 1997년 말 「국민의료보험법」을 통과시켰다. 의료보험의 범위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되자 의료 수요는 폭발했고 이는 초대형 병원의 등장과 병원급 이상 의료 시설의 급격한 증가를
일으켜 의료기관들 사이에서 시장주의적 경쟁을 촉발시켰다. 공공병원의 정체와 민간병원의
성장이라는 비대칭을 가속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전국민의 료보험의 도입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보건의료 재정의 공공화와 의료 공급의 사유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한방진료부의 설치와 한약분쟁

1988년 국민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양방과 한방간의 학술 교류와 양한방 의료 협진의 활성화의
일환으로 국립의료원의 한방진료부 설치를 의결하고, 1990년 10월 13일 국립병원 최초로
한방진료기관을 설립하도록 결정하였다. 양한방 진료 협조 측면세어 보면 양방진료부 에서는 주로
검사 의뢰를, 한방에서는 우수한 약제를 의뢰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의료원을 찾는 환자들이 한방 진료를 선호하는 이유로는 한방전문 진료시설과 우수한약제 사용,
초음파 및 컴퓨터 단층 촬영 등 최신 의료기기에 근거한 양한방 종합진료 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드러낸 응급의료의 수준

강남 도심 한복판에서 붕괴한 건물에서 500여 명의 사망자와 1,000 여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사건 직후 인명 구조와 의료지원을 나온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무질서 속에서 골든타임을 놓쳐
안타까운 생 명을 잃는 상황이 펼쳐졌다. 환자의 손상 상태에 따라 중증도를 분류 하는 등
재난응급구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인력은 거 의 없었다. 당시 응급처치팀으로 현장에
상주했던 국립의료원 황정연 응급실장은 무질서로 엉망이 된 구조현장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신문
기고를 통해 응급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목소리를 높여 사회적 여론 조 성에 힘썼다.
국립의료원은 응급구조 교육 첫 시행부터 응급구조사 양 성기관으로 선정되어 훈련생들을 대상으로
이론과 실기교육을 실시 했고, 다수의 응급구조사를 배출해냈다.

민영화 논의와 동요

1994년부터 떠돌기 시작한 국립의료원의 매각과 기능전환 논의는 타격이 컸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의료 선진화를 위한 직원들과 의료진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1995년 5월에는
임상시험센터를 개 소하고 신약재심사제도와 의약품 임상시험 관리기준(KGCP)를 전면 실시했다.
1997년 2월에는 환자 및 진료 특성을 반영한 입원환자 분 류체계에 따른 지불제도 시범사업
요양기관으로 선정되어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포괄수가제를 시범적으로 적용했다.
각 과별로도 수술 및 치료법의 개선과 저소득층 환자를 위한 무상진료는 계속됐다. 비록 정책적,
재정적 지원은 현저히 미흡했지만 의료진들과 직원들의 노력으 로 국가의 보건의료정책과
공공의료를 책임지는 유일한 국립병원의 명백을 이어갔다.

1998-2008

IMF 외환위기, 시험대에 오른 공공의료

의료보험 통합의 성과와 한계

1997년 말 「국민의료보험법」이 제정되면서 불거진 의료보험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 적지 않은
산통을 겪었지만, 2000년 7월 1일 자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39개 직장의 의료보힘이
단일조직으로 통합되면서 ‘의료보험’은 ‘건강보험’으로 이름을 바꿨다.
의료보험의 통합은 보험료 부담의 공평성 확보, 관리운영의 효율화, 가입자의 편의 증진,
저급여에서 적정급여로의 전환 가능성을 높일 수 있게 만들었다. 의료보험 통합은 처음부터 온전한
통합방식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미완의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건강권, 사회적
연대를 중심 이슈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 통합은 보건의료정책이 주요
쟁점으로 평가되는 것을 떠나 한국 민주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국립의료원의 구조조정과 위기 속에서 발한 역량

정부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립의료원은 만성적인 적자 해소와 공공성 확보라는, 병립하기
어려운 과제를 풀어야만 했다.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립의료원은 국내 공공의료체계의
중추로서 그 역할과 기능을 다지기 위해 2000년 2월에는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 문을 열었다.
7월에는 응급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중앙응급의료센터로 지정하였으며, 이듬해 11월
중앙응급의료센터 설립이후 2002년 1 월부로 중앙응급센터 업무가 시작됐다.
2001년 2월에는 김포국제공 항에 분원을 개원한다. 이후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사스
(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할 당시에는 사스 의심치료 지정병원으로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며 진료체계를 마련했다.

의료계 집단폐업으로 대두된 공공의료의 역할

의약분업이 시행된 2000년 한 해만 총 5차례의 의료계 파업이 계속 되면서 국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집단폐업으로 동네 병원은 물론, 전공의와 전임의가 파업에 나선 대학병원까지 정상 진료가
불가능해지며 환자들은 국립의료원으로 몰려들었다. 처음 겪어보는 의료대란에 의료계에 대한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때였다. 이 와중에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공공병원의 책임을 이어가려는
국립의료원의 노력은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을 불러온
2000년 6월의 집단 폐업은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번 사태로 인해 공공의 이익이 걸려 있는
보건의료 부문을 시장경제 원리에만 맡길 수 없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이는 곧 공공의료의
확충이라는 요구로 이어졌다.

국립의료원 법인화 논란

개원 47년 만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는 단순히 국가중앙의료원의 명칭을 바꾸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립의료원 운영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환자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진단에 따라 조직,
인사, 재정의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소속기관에서 특수법인으로 전환하 자는 것이었다.
특수법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립간호대학은 문 을 닫게 됐다. 서울지역 40개 종합대학을
대상으로 공모한 결과, 성신 여대가 이를 승계하기로 하고 국립간호대학은 2006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현실화될 것 같았던 법인화라는 청사진은 숱한 논란과 혼란을 야기한 채
표류했다. 보건복지부가 17대 국회에 제출 한 「국립중앙의료원법」은 1년 가까이 계류하던 중
2008년 5월, 회기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2008-2017

영리화와 의료불평등

민간의료의 팽창과 공공의료의 위축

의료서비스를 시장의 자율경쟁에 맡기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부상한 보건의료정책은
의료민영화 대신 ‘의료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계획됐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의료 산업화에
집중하는 사이, 열약한 공공 의료체계는 신종인플루엔자가 확산되면서 다시금 쟁점화되었다.
당시 정부가 지정한 치료 거점병원은 대부분 민간병원이었다. 하지만 국가적 재난상태에 대비한
시설과 장비 부족, 대응 매뉴얼의 부재로 국민의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신종인플루엔자의
유행이 끝난 후에는 신종인플루엔자 대응 미비점 보완을 위해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으나 민간병원에 의존하면서 겪었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국립의료원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대응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발생했다.

메르스, 공공의료의 위기 또는 기회

2015년 맞이한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파동은 치명적이었다. 부실한 초기 대응과
취약한 국내 의료 전달체계로 인해 병원을 중심으로한 2차, 3차 감염이 빠르게 확산됐다.
메르스 중앙거점병원으 로 지정된 국립중앙의료원은 즉각 ‘메르스 비상대책본부’를 구성해 전 직원이
24시간 비상근무체계에 들어갔다. 사상 첫 감염병 중앙거점 의료기관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국립중앙의료원은 상황에 따라 시설과 인력을 새롭게 구축하며 신속하게 대응했다. 이후 2017년
2월에는 국립중앙의료원이 중앙감염병 병원으로 지정되었고, 감염 병의 진단과 치료, 관련 연구,
교육·훈련 및 자원관리 등 감염병 대응 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수법인 국립중앙의료원의 탄생

2009년 3월, 「국립중앙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2010년 4월 2일,
특수법인 국립중앙의료원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공공의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공공보건의료사업단’을 설치하여 소외계층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확대했다.
국내 병원 가운데 처음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말하는’ 처방전과 진단서를 발급하고 장애인 전용
접수창구를 개설했다. 하지만 법인화 3년 후, 우리나라 최고의 공공의료기관이라는
국립중앙의료원의 초라한 현실은 빈약한 공공의료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법률이 통과될
때까지만 해도 2014년도에는 신축한 병원이 정상 가동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부지 선정부터
지지부진 미뤄지고 있었다.

세월호와 응급의료체계 재정비

2014년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는 재난의료에서 국립중앙의료원의 책임을 더욱
무겁게 느낀 사건이었다. 응급의료종사자 교육 및 훈련, 국내외 재난 대응 등 응급의료의 중추로
기능해 온 국립중앙의료원은 법인화 후 정보망 구축, 응급의료 지표·지수 개발, 응급의료 생활화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응급의료의 기능을 강화했다. 국가응급진료정보망(NEDIS)을 구축해
응급환자의 신속한 이송 및 응급의료의 질을 향상시키고 24시간 재난대응체계도 새롭게 갖췄다.
더불어 재난 심리지원을 위해 ‘재난 관련 정신건강관리’ 지침서 발간, 자살시도자의 사후관리를 위해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를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 정신건강증진을 위해 활동범위를 꾸준히 넓혀왔다.

2017-현재

의료공공성 강화와 국가책임

재개원 수준의 정비

2018년 5월 28일, 국립중앙의료원은 새 병원 건립 및 공공의료대학 설립을 위해 조직을 개편했다.
공공보건의료 중추기관의 새로운 역할을 다하겠다는 국립중앙의료원의 구상은 ‘공공보건의료발전
종합대책’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약속한 ‘국가중앙병원 설립’은 병원의 신축을
빼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2017년 2월, 국립중앙의료원에 중앙감염병병원 설치가
결정됨에 따라 의료원 신축이전을 조건으로 원지동에 추가 부지 확보가 검토됐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서초구의 감염병병원 반대, 소음기준 초과 등의 문제를 두고 보건복지부와 논의를
했지만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더 이상 기다릴수만은 없다'는 판단 하에
국립중앙의료원은 사업의 추진부서의 해체를 통해 사업추진의 일시 중지를 선언했다.

코로나 19가 바꾼 것

2020년 1월 24일 국립중앙의료원에 코로나19 환자가 이송됐다.
중국 우한에서 원인불명의 폐렴환자들이 집단으로 발생했다는 소식 후 중국 질병예방통제센터는
이 감염병을 ‘신종 코로나 비이러스’라고 규정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COVID-19’라는
공식 명칭을 붙였다.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 직후 국립중앙의료원은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에
대비해 비상체제로 전환했다. 제한적 조건에서나마 중앙감염병병원운영센터를 중심으로
중앙감염병병원의 기능을 능동적으로 수행했다. 국가적 위기 국면에서 총력을 다한
국립중앙의료원의 분투는 정책 집행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18년간 표류했던
국립중앙의료원의 신축이전 및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을 방산동 미 공병단 부지로 최종
확정시켰다.

응급·중증외상·재난의료 전달체계

1995년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래로 응급의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응급실 서비스에 대한 전반적인 국민들의 만족도는 높지 않았고, 이러한 인식에 기반해 응급환자
발생부터 최종치료까지 제공하는 응급의료 전반의 개선 방안을 담은 ‘2018 - 2022년 응급의료
기본계획’을 심의·확정했다. 하지만 정책의 방향과 기초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불시에
발생하는 중증응급환자에 대한 신속·적절한 대응 수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 응급의료 체계의
수준을 끌어올린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센터장의 죽음은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응급의료체계의 주요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민·관·합동
응급의료체계 개선협의체’가 2019년 3월에 출범했다.

다시 세우는 공공보건의료체계의 비전과 전략

2021년 11월 1일, ‘단계적 일상회복’의 시작을 알렸다. 메르스 때도 그랬듯이 코로나 대유행이
터지자 뒷감당은 또다시 공공병원 몫이 되었다. 코로나 사태는 보험과 수가를 유일한 정책 수단으로
삼아 관리해왔던 우리 의료시스템의 문제를 수면 밖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코로나 대유행은
국립중앙의료원 65년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18년 동안 지연됐던 신축이전
문제가 방산동 옛 미군 공병단 부지로 결정되고 중암감염병병원 건립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가 안보의 군사 기지를 현대적 보건 안보의 터전으로 탈바꿈하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보루이자 전 세계 시민들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협력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의 미래는 또 다른
인류애의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